[인도/실리구리]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발행일: 2026년 4월 22일

인도에 온 지 벌써 16년이 되어갑니다. 초보 선교사의 어설픔과 중고참의 무게 모두 이 땅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은 그 세월 속에 묻어두었던 한 이야기를 꺼내 보려 합니다. 부끄럽고 아프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더 나눌 가치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2016년, 선교 초기부터 품어온 비즈니스 선교의 비전을 구체화하기 위해 땅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미래를 위한 작은 씨앗을 심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여기저기 소문을 내던 중, 한 사람의 소개로 꽤 그럴듯한 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일반 땅 400평과 소수 부족 땅 400평, 총 800평이 나란히 붙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협상은 길어졌지만, 그 땅이 마음에 깊이 박혔습니다. 결국 아내가 오랫동안 몰래 아껴두었던 퇴직금과 여러 곳에서 받은 후원금을 모아 재정을 마련했습니다. 계약서를 쓰기 전, 등기부등본도 꼼꼼히 확인하고 각종 서류를 살폈습니다. 땅 주인은 교회당 바로 앞에 살며 목사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현지 기독교인 B씨였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믿음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계약금을 건넸으며, 잔금을 준비하기 위해 한화를 인도 루피로 조금씩 환전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인도 정부가 지하 자금을 양성화하겠다며 갑자기 고액권 화폐를 폐지하고 새 디자인으로 교체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야당도 몰랐고, 시장도 몰랐고, 저도 몰랐습니다. 순식간에 시장이 얼어붙었고, 한화 300만 원이 넘는 구권 화폐를 신권으로 바꾸려면 그 자금의 출처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증명하지 못하면 그대로 휴지 조각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잔금으로 준비해 둔 돈이 모두 구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부탁하고 매달려 어렵사리 신권으로 교환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계약상의 잔금 납부 기한을 넘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처음 계약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넘겨주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 추가 금액만 1,000만 원이 넘었습니다.
그 이후로 B씨의 진짜 모습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교회 앞에 사는 목사님을 잘 돕고 섬기는 중직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언제나 성경 말씀을 함께 나누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기 이후에는 그런 모습은 간데없고, 주변 일꾼들의 임금을 체불하고 욱박지르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변호사와 함께 찾아갔고, 지역의 유명 목사님과도 함께 갔습니다. 부탁도 해보고, 압박도 해보고, 읍소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돈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그 땅이 처음부터 그의 소유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돈도, 땅도, 그리고 그를 믿었던 마음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혼자 식탁 앞에 앉는 아침이 많아졌습니다. 눈물이 그냥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 틈새로 검고 뜨거운 것이 차올랐습니다. 복수. 그 단어가 가슴속에서 똬리를 틀었습니다. 새로 산 차에 불을 질러버릴까. 아들 학교 앞에서 한마디 할까. 그런 생각들이 정말로 들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결국 실행에 옮겼습니다. 폭력배 출신으로 은혜를 받아 목사가 된 현지 목사님을 소개받아, 바블루를 압박하러 함께 찾아갔습니다. 그분 주변에는 아직도 어둠의 세계에 발을 담근 이들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기에, 충분히 겁을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너무나도 조용했습니다. 분노 한 마디 없이, 위협 한 마디 없이, 그저 나직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제 안에서 갑자기 목소리 하나가 물었습니다.
“넌 이 목사님이 어떻게 해주기를 원했던 거니? 때려주기를? 위협해서 돈을 받아내 주기를?”
어느 물음에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할 수 없음 속에서, 비로소 제 안에 있는 것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어떤 경로를 통해 네팔에서 사역하시던 한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느 겨울날, 남편 선교사님이 홀로 시골 출장을 떠난 사이, 아내 선교사님은 큰 아이 둘과 수유 중인 갓난아기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매서운 추위에 침실 난로에 불을 피워두고, 막내에게 젖을 먹이러 잠시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긴 그 짧은 순간, 난로가 켜진 방 안에서 산소가 부족해졌고, 두 아이는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선교지에서 두 아이를 땅에 묻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가정은 네팔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작아졌습니다. 저는 그저 돈 1,000만 원을 잃었을 뿐입니다. 한없이, 바닥까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작아지고 나서야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복수를 꿈꾸던 자리에 조금씩 다른 것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한 단어로 말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어둠이 아니라 빛 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B씨를 다시 볼 날이 올지 모릅니다. 그때 제가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지, 아직도 자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충분히 깨어지지 않았던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이야기 입니다

서바나바, 김기쁨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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